담백한 친절

from 분류없음 2012.02.14 15:16

한국사람들은 평소에 간이 센 음식을 먹고 살아서인지

뭘 하든지간에 적당히 하지 못하고 다 빡세게 하는 경향이 있다.

근데 과유불급이란 사자성어도 있듯이 뭐든지 다 빡세게 한다고 좋은 게 아니다.


고객응대(CS라고 하는)가 그 '빡세서 안좋은' 대표적인 예다.

욕을 바가지로 해대면서도 장사만 잘 되는 욕쟁이 할머니집도 있지만,

손님을 상대로 장사하는 가게들에서는 친절이 기본 스킬이다.

요샌 또 그런 고객만족이니 하는 가치가 장사하는 데에 굉장히 중요한 요소로 부각되고 있어서

무슨 CS교육이니 친절사원이니 하는 걸로다가

직원들에게 친절한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해 노력들을 한다.

(나도 그 CS교육 몇번 받아봤다. 집중 안하면 잠와 죽을거 같고, 집중하면 초 오글거리는 내용들 뿐임)

덕분에 마트나 백화점 같은 기업형 매장에 가면 여기서 고갱님 저기서 고갱님 아주

귀에 박히게 고갱님 소리에 가식적인 웃음 소리에 기가 질릴 판이다.


예전에 블로그에다가 한번 지껄인 적이 있는데,

난 개인적으로 고객이란 말 자체를 별로 안좋아한다.

손님이란 친근하고 좋은 말 있는데 괜히 고객님이라고 해서

쓸데없이 어렵게 말을 한다고나 할까.

나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요새 뭐 호갱님 어쩌고 하는 소리들을

하는 거 보면 다른 사람들한테도 썩 유쾌하게 들리지는 않는 모양이다.


고갱님 정도면 양반이지. 오홍홍홍 하는 웃음소리(보통 고객센터 전화걸면 상담원들이 한다)

그거 웃는 상대방도 별로 기분좋아서 웃는 것 같지 않고 시켜서 한다는 느낌이 확 난다.

뭐 따지고보면 전화해서 진상피우는데 뭐가 좋다고 오홍홍홍 웃고 있겠냐. 나한테 작업거는것도 아니고.

거기에다가 미용실 가면 굳이 내가 의자 꺼내고 짐 놔둬도 되는데

와서 의자 빼주고 짐 보관해주고(요건 필요성이 있긴 함) 집에갈땐 문열어주고

멀어져 가는 내 뒤통수에 대고 하염없이 인사를 한다.

보통 신경 안쓰고 그냥 집에 갔는데, 저번에 한 번 가다가 뒤돌아보니 아직도 문밖에 나와 내 뒤통수를 쳐다보고 있더라.

솔직히 감동받았다기보다는 질릴 뻔 했다.


과잉 친절. 이거 잘사는 사람들은 당연하게 누리는지 모르겠지만

나처럼 가난하고 찌질한 사람들한테는 불편하기 그지없다.

내가 돈 일이만원 쓴다고 왕처럼 대접을 받아야하는지도 잘 모르겠고

(머리깎는데 1~2만원이 그렇게 큰 돈 같지는 않은데)

무엇보다도 돈받고 일하는 사람들은 종이 아닌데 하는 생각도 든다.

뭐 이런 생각은 내가 마트나 매장에서 일을 했었기 때문일 수도 있는데,

저 사람들도 나한테 굽신거려야 할 만큼 못난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자꾸 나한테 굽신거리고

할 수 있는 최상급의 존대를 해 주고 하니 불편하고 부담스러운 거다.

그 사람들도 자존심이란 게 있을 거고 일에 대한 프라이드도 있을 건데.

암튼 이건 내 개인적인 생각이고 다른 사람들은 과잉 친절에 대해 별로 거부감이 없을 수도 있으니까.

하긴 일하다 보면 과잉 친절을 즐기거나, 악용하는 인간들도 참 많더라.

(당최 고객이 왕이란 소린 누가 만든건지 원)


암튼 뭐 그렇다 치고.



오늘 정크 푸드의 풍미를 한껏 느끼고 싶어 근처 맥X날드에 갔다.

어느 곳이나 그렇듯이 앳된 알바들이 카운터를 지키고 있었는데,

내가 줄을 서자 주문 받는 알바가 낭랑한 목소리로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했다.

알바가 무슨 여신급으로 예쁘거나 귀여운 것도 아니었고(살짝 귀엽긴 했....-_-)

나한테 특별히 친절을 베풀지도 않았는데

(맥도날드는 심지어 카드 인식까지 손님한테 시킨다)

굉장히 기분이 좋아졌다.

게다가 그 알바는 고갱님 고갱님 하면서 나한테 굽신거리지도 않았다.

그냥 낭랑한 목소리로 인사를 하고, 주문을 받고, (나한테) 카드결제를 시켰다.

뭐 다른 수식어를 갖다 붙이거나 괴상한 목소리를 내거나 괴상한 동작을 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응대를 받는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이제껏 어떤 매장에서도 느낄 수 없었던 친절함이 느껴졌다.

아 씨바. 이게 진짜 당하는(?) 사람도 부담없고 기분좋은 진짜 친절이구나.

음식을 받고 자리에 앉았는데 계속 그 알바의 낭랑한 안녕하세요오~ 소리가 들렸다.

덕분에 난 즐겁게 쿼터파운더 치즈버거 세트를 잘근잘근 씹어먹을 수 있었고,

유쾌하게 매장을 나설 수 있었다.


그 CS교육 한다는 사람들한테 좀 보여주고 싶다.

맨날 이상한 손동작이나 목소리 톤 따위 가르치지 말고

상대방 열라 부담스럽게 만드는 그런 짓좀 시키지 말고

가르칠 수 있다면 저런 친절 좀 가르치라고.

뭐 가르쳐서 되는 건 아닐 것 같더라만.

posted by drunkenste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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