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회사 직속 상사가 보이스피싱에 걸려 200여만원을 사기당했다.
회사 상사인데다가 과장급 직책을 가진 직장여성이기에 보이스피싱에 당할 거라는 생각은 절대 들지 않는 사람인데
덜컥 당해버렸다. 그것도 내가 보는 바로 앞에서.

사건경과는 이렇다.
먼저 ARS로 전화가 왔다.
우체국인데, 반송된 물건이 있으니 찾아가라는 안내 전화였다고 한다.
택배나 등기가 올 일이 없었던 내 직장 상사는 '올게 없는데?'하고 의아해 하면서
ARS안내로 흘러나오는 '상담원 연결'에 별 의심 없이 0번을 눌렀다.
그러자 나타난 여자 상담원의 목소리.
물건이 뭐냐고 묻자 우체국에서 발급된 신용카드라고 한다.
그러나 카드를 발급받은 적이 없는 직장 상사는 신용카드를 발급받은 적이 없다고 상담원에게 대답을 하고,
그러자 그 상담원은 개인정보 유출이 의심된다고 상사를 겁주기 시작했다.
발급 신청을 한 적도 없는 카드가 발급되었으니, 당연히 개인정보 유출이 누구라도 의심되는 상황.
때를 맞춰 그 상담원은 '그렇지 않아도 경찰청에서 지금 개인정보 유출건에 대해 대대적으로 수사를 하고 있는데
원하시면 연결을 해 드리겠다'고 권유를 하고,
상사는 안그래도 불안한 상황에 경찰청이라니 덥석 그래 달라고 대답을 한 뒤 전화를 끊고
얼마 후에 걸려올 거라는 '경찰청'의 전화를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걸려온 정체불명의 전화번호.
(006 어쩌고 하는 번호였다는데, 이때 눈치를 챘어야 했다.
하지만 있지도 않은 개인정보 유출 때문에 머릿속은 이미 패닉상태)
대뜸 경찰청이라면서 개인정보 유출이 확실시 되고, 그렇기 때문에 '안전장치'를 설정해야 한다면서
직장 상사를 근처 ATM으로 유도한다. 물론 끊지 말라는 지시와 함께.
패닉 상태에서 경찰이라니깐 덥석 낚여버린 직장 상사는 시키는 대로 ATM에 가서
시키는 대로 번호를 누르기 시작한다.
수사를 가장해서 '통장에 얼마나 있나요'하는 식으로 통장 잔고를 알아낸 사기범은
통장잔고와 비슷한 무작위의 숫자를 불러주면서 그것을 누르라고 하고,
(나중에 확인한 이체금액은 2115158와 같은, 금액 같지 않은 숫자였다)
직장 상사는 약간의 의심이 들어서 주저주저 했는데
비밀 수사라는 말과 함께 '개인정보가 다 새나가서 통장이 다 털리게 생겼는데 날 의심하는 거냐?'는
사기범의 담대한 호통(?)에 그만 이체버튼을 눌러버리고 만다.

이체 이후에는 명세표를 찢어버리라는 둥, 다섯시까지는 주변 사람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말라는 둥
의심스런 행동이 계속 이어지자 그때서야 의심이 슬쩍 들기 시작한 직장 상사.
혹시나 해서 우체국 콜센터에 전화를 해 봤는데, 반송된 것을 전화로 안내를 하지 않는다는 말에
그제서야 보이스피싱을 알게 되고
은행 창구로 가서 급히 지급정지를 신청했지만 이미 계좌이체 직후에 돈은 인출되고난 후였다.

당하고 나서 생각해 보니, 허술한 점이 한두개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당할 땐 정말 정신 없이 순식간에 당하는 거다.
하나하나 생각해 보자.
먼저, 사건의 발단인 우체국 ARS전화.
우체국 콜센터에서도 알려줬듯이, 우체국에서는 ARS로 반송안내를 하지 않는다.
등기우편에는 전화번호 정보가 없다. 그래서 등기는 수취인이 부재중일 때 우체부 아저씨가 대문에다가
쪽지를 붙여놓고 갈 뿐, 전화안내를 하지 않는다. 아니, 하고 싶어도 전화번호가 없어서 할 수가 없다.
택배의 경우에는 택배기사가 직접 본인 목소리로 전화를 해서 안내를 해 준다.
ARS로 안내를 해 주는 경우는 없는 거다.
생각해 보면 우체국에서 반송안내 전화가 올 수가 없는데, 막상 당하면 그런 생각보다 '어? 나 받을 게 없는데?'란
생각밖에 안 든다고 한다. 그러니깐 평소에 생각을 하고 있어야 한다.

두번째, 정체불명의 전화번호.
분명히 한국 전화번호가 아닌 괴상한 번호였다.
경찰청이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발신자 정보가 알려져서는 안되는 비밀 기관이라면
발신번호 제한을 해 놓으면 되는 거 아닌가?
난 그 006으로 시작하는 번호를 받았다는 게  가장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직장 상사는 그 전화를 받았다.

세번째, 비밀수사라는데 '우체국 콜센터'에서는 그걸 어찌 알고 연결을 시켜줬나.
사기범이 상사를 낚은 결정적인 요인 중 하나가 그 '비밀수사'란 거였는데,
그거 덕분에 은행 창구가 아닌 ATM으로 가서 안전장치를 하게 만드는 트릭을 성공시킬 수 있었고
여러 가지 이상한 상황(괴상한 전화번호라던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한다던지 하는)을
그냥 넘어갈 수 있었다.
근데, 은행 직원에게조차도 비밀로 지켜야 할 은밀한 수사가 이뤄지고 있다는 걸
일개 우체국 콜센터에서는 어떻게 알고 연결을 시켜 줬다는 말인가?
정말 이건 나중에 생각해 보니 나타난 건데, 아무튼 생각해 보니 무지 허술한 거다.
콜센터는 절대로 대단한 곳이 아니다. 우리 옆집 아줌마나 누나가 박봉 받으면서 고생하는 데가 콜센턴데,
그런데서 무슨 비밀 수사대한테 연결을 시켜주겠는가.




생각해 보면 이상한 점도 한두가지가 아니고, 허술한 점도 수두룩하다.
그런데도 내 직장 상사는 당해버리고 말았다.
평소에 어리숙한 사람도 아니고, 도리어 너무 똑똑해서 문제인 사람인데 말이다.
수많은 보이스피싱 사례를 접하면서 저런거에 누가 당하나 하겠지만,
정신없는 상황에서(사건 당시 일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전화 받으면 아차 하는 순간에 당하는 거다.
더군다나 개인정보가 유출되었다고 겁을 주는데, 갑자기 그런 소릴 듣고 평상심을 유지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그래서, 주변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
참으로 나도 후회스러운게 분명 그 전화를 받고 있는 순간에 내가 옆에 있었다.
처음에 우체국 반송 이야기를 하고 있길래'우체국에선 반송되도 전화 안하는데요'라고 참견을 하려고 했었다.
그렇지만 워낙에 뭐 그런거에는 똑부러지는 사람이라 알아서 하겠지 해서 그냥 넘겼다.
더군다나 얼마 후에는 경찰과 통화를 하고 있으니, 알아서 잘 해결됐구나 하면서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그 두 번의 기회 중에 한번만이라도 내가 옆에서 참견을 했더라면,
최악의 결과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도, 아니 오히려 똑똑한 사람일수록
그런 상황에서 평상심을 잃으면 덥석 낚여버리기 쉬울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기상황에 몰입되지 않은 주변사람의 도움이 필요한 거다.
주변사람이 의심되는 통화를 하고 있으면, 나중에 괜한 참견이라고 핀잔을 듣게 되더라도
일단은 '그거 보이스피싱 아냐?'하고 참견을 해 주자.
참견한다고 뭐가 없어지거나 피해를 받는 건 아니지 않나.
그거 잠깐 하는게 귀찮거나 핀잔이 두려워서 적극적으로 참견해주지 않으면
두고두고 후회할 사기 피해의 피해자 주변인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

누가 우체국이나, 경찰청과 수상한 통화를 하고 있으면
망설이지 말고 참견하자.
'그거 보이스피싱 아니에요?'라고.

posted by drunkenste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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